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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
    Christianity 2019. 8. 30.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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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

    칼빈주의 5대 교리 중 세 번째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의 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속량하신자들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대상에 대해서는, 역사상 두 가지 견해가 있다. 하나는 보편속죄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한속죄설이다. 보편속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런 견해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과 구원이 궁극적으로 사람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알미니우스주의는 이런 견해를 가진다. 이와 구별하여, 제한속죄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인류 전체를 구원하기를 원하셨는가, 아니면 인류 중 일부 즉 그가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류 전체를 위해 즉 인류 전체의 죄책과 죄의 형벌을 담당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는가, 아니면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죄만을 위해 돌아가셨는가? 이것은 구원받은 자들의 구원의 보장(保障)의 문제와도 관계되며, 또 전도할 때 전도자의 실제적 마음가짐에도 관계된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문제는, 구원이 오직 사람 자신의 결심에 달려 있는가, 혹은 달리 표현하여, 하나님께서 실제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구주이신가라는 점이다. 개혁교회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제한성을 성경적 진리로 고백해 왔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의 근거는 다음 3가지 요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구원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는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밝히 가르치며 또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가르친다. 시편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요나 2:9,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마태복음 19:24-26,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저희를 보시며 가라사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로마서 9:16, 18,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야고보서 4:12, “[하나님께서는] 능히 구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그 외에도, 마태복음 16:17,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사도행전 11:18,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사도행전 16:14,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신명기 29: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또 하나님의 예정이 효력이 있다는 사실도 구원이 하나님께 달려있음을 확증한다. 요한복음 6:39, “하나님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한복음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사도행전 13:48,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이런 모든 말씀들을 볼 때, 사람의 구원이 오직 자신의 결심(회개와 믿음)에 달렸다고 생각해서는 안 되며, 또 사람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거나 제한해서도 안 될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구원하시려고 뜻하셨다면, 인류 전체를 구원하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는 능치 못하시는 일이 없다. 그런데 보편속죄설은 사람의 구원이 자신의 결심에 달렸다고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구원의 능력을 부정하는 잘못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전능하긴 하시지만 사람의 마음과 의지를 변화시키실 수 없고 또 변화시키시려고도 하지 않으신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제한적이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는 하나님의 구원 의지와 그 행위가 제한적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진리와 하나님의 선택하심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제한성을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이 제한적이지 않다면, 선택이라는 용어가 사용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경은 인류 전체와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기 백성, 자기 사람들, 자기 양들에 대해 분명히 증거한다. 마태복음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하라. 이는 그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요한복음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요한복음 10:15,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요한복음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17:9,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 민족들과 구별하여 사랑하심도 하나님의 구원의 제한성을 증거한다. 호세아 11:8,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 이스라엘이여,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같이 놓겠느냐? 어찌 너를 스보임같이 두겠느냐? 내 마음이 내 속에서 돌아서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하도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도 구원의 제한성을 암시한다. 이사야 53:5, 6, 8,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 . .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하려 하심이니라.”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또한 그리스도께서 ‘많은’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는 말씀도 구원의 제한성을 암시한다. 이사야 53:11-12,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의롭다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라. . . .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마태복음 20:28,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마태복음 26:28,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알미니우스주의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히 크심을 옹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부정한다.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은 어떻게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분만 구원하기를 원하시고 그 나머지를 영원한 멸망 가운데 버려두실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나, 알미니우스주의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믿는 보편구원을 주장하지 않는 한--보편구원론은 명백히 비성경적 이고 알미니우스주의는 그런 주장을 하지 않는다--그들의 보편적 속 죄설은 하나님의 사랑을 참으로 옹호할 수 없다. 왜냐하면 구원의 능력을 가진 전능자가 죄로 멸망하는 인생을 관망만하고 있다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옹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두려운 사 실이지만, 하나님께서 인류의 일부분을 영원한 멸망에 버려두셨다는 것은 성경이 증거하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속죄는 실제로 죄의 형벌을 대신 받는 것이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속죄의 본질적 성격에 있다. 속죄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우리의 죄책과 형벌을 담당하신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우리의 죗값을 지불하고 사셔서 우리를 구원하셨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갈라디아서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사도행전 20:28, “주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피 공로는 결코 헛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어떤 사람을 위해 속죄의 피를 흘리셨는데 그가 멸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자들, 영원 전에 선택된 자들, 곧 그의 양들을 위하여 속죄의 피를 흘리셨고, 아버지께서 그에게 주신 그들, 바로 그가 피흘려 사신 자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구원하신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셨다면, 멸망받을 죄인이 세상에 한 사람도 남지 않아야 하고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논리적이다. 왜냐하면 속죄의 본질적 성격상 핏값을 주고 사신 자들은 다 구원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보편속죄설은 논리적으로 보편구원론에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보편 구원론은 성경적 진리일 수 없다. 마태복음 7:13,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누가복음 13:23, 24, “구원 얻는 자가 적으니이까? . . .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죤 오웬(John Owen)은 제한속죄의 진리를 다음과 같이 증명했다.
    성부께서 그의 진노를 부과하시고 성자께서 그 형벌을 받으신 것은 (1)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서든지, (2) 일부분의 사람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서든지, 혹은 (3) 모든 사람들의 일부분의 죄들을 위해서이다. 각 경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만일 마지막 경우가 참되다면, 모든 사람들은 책임을 져야 할 어떤 죄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따라서 아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두 번째가 참되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선택된 자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 그들을 대신하여 고난을 당하셨을 것이고 이것이 진리이다.
    그러나 만일 첫 번째가 참되다면, 왜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죄로인한 형벌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는가? 불신앙 때문이라고 여러분은 대답한다. 나는 묻는다. 이 불신앙은 죄인가 죄가 아닌가? 만일 그것이 죄라면,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으로 인한 형벌을 받으셨거나 그렇지 않거나 할 것이다. 만일 주께서 받으셨다면, 왜 그것이 주께서 대속하신 그들의 다른 죄들 이상으로 그들에게 방해가 되어야 하는가? 만일 주께서 그것의 형벌을 받지 않으셨다면, 그는 그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 죽지 않으셨다는 말이 될 것이다.

     

    보편속죄설을 지지하는 듯한 구절들

    에스겔 18:23,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에스겔 33:11도 비슷한 말씀임)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공평함과 의로움을 강조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악인의 멸망을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심판은 의롭고 공평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의롭게 살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가 그가 세상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그의 적극적 의지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위에서 언급된 성경 진리들, 특히 선택에 관한 성경의 진리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세상 죄를 지고 간다’는 표현은 예수께서 세상 사람들의 모든 죄를 짊어지신 대속 제물로 오셨고 죽으신 하나님의 어린양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들을 짊어지신 대속 제물이셨다면, 모든 사람은 다 구원에 이르러야 하고 마지막 심판과 지옥 형벌은 없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 의하면, 속죄는 실제로 죄인들의 죗값을 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보편구원론은 성경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 명백하고 또 알미니우스주의자들도 긍정하는 바 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 속죄를 증거하는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 ‘세상’은 대략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실상, 하나님의 택하신 사람들은 온 세상, 온 인류를 대표한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도 알미니우스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구절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음을 증거하는 것처럼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 빛 아래서 볼 때, 이 구절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음을 증거할 뿐이며, 모든 사람이 믿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성경은 사람의 전적 부패성에 대해 너무 분명하게 증거한다. 그러므로 이 구절도 사람의 전적인 부패와 무능력, 하나님의 선택,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 등의 분명한 성경 진리의 빛 아래 해석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 구절은 하나님의 보편적 구원의 의지를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만일 이 구절의 뜻이 그러하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 의지의 제한성을 보이는 구절들, 특히 선택의 진리의 구절들과 모순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절도 다른 구절들과 조화시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성경의 어떤 구절의 의미가 성경의 다른 구절들의 명백한 진리와 모순될 때, 우리는 그 구절에 대한 가능한 다른 해석이 있는지 생각해야 한다. 이 구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세 가지의 가능한 해석이 있다.
    (1) 이 구절은 에스겔 18:23과 비슷하게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가 곧 그의 적극적 구원 의지와 동일하지는 않다.
    (2) ‘모든 사람’이라는 말이 대략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성경에서 특히 디모데전후서에서 ‘모든’이 대략적 의미로 사용된 예들이 많다. 디모데전서 2:1,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하되].” 디모 데전서 4:15,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디모데전 서 5: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디모데후서 1: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디모데 후서 4: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앞에 인용한 구절에서 ‘모든’이라는 말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없고 대략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3) ‘모든 사람’이라는 말이 ‘선택된 자들 모두’라는 제한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요한복음 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나님의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이 없이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디모데전서 2: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이 구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위해서가 아니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죗값을 지불하시기 위해 자신을 주셨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한 죽음이었다는 근거 구절로 인용될 수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를 믿어야 할 이유들과 조화시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은 대략적 의미 혹은 제한적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1) 이방인과 유대인 모두를 가리키든지, (2) 각계 각층의 사람 모두를 가리키든지, 혹은 (3) 엄격히 말해, 하나님께서 택하신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베드로후서 3:9,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은 에스겔서의 말씀들과 비슷한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으나, 이 구절에서 ‘너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교인들 즉 신자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한속죄의 진리는 어떤 이들이 오해하듯이 전도의 필요성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선택과 속죄 뿐 아니라, 또한 전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죄인을 구원하는 필수 과정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죄인 구원의 방법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과 그리스도의 제한적 속죄를 믿는 동시에 복음을 전해야 하고, 바로 그러한 진리들을 믿기 때문에 오히려 더욱 담대히, 낙심치 말고 전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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