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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신칭의/갈라디아서 2:15-21 / 김형익 목사 / 주일오전설교 / 2007-07-08
    Sermon 2019. 8. 8.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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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신칭의


    갈라디아서2:15-21

    •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1. 칭의 교리: 기독교의 심장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교리이며, 복음의 핵심이고, 기독교의 심장이라고 말하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즉,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이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을 만드는 교리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칭의의 교리를 잃어버리면 기독교 교리 전체를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크랜머는 말했습니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의 헛된 영광을 뒤엎는다. 이를 부인하는 자마다,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지 못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에 대한 적수이며 인간의 헛된 영광을 드러낸다.”

    A. 칭의 교리는 최고로 압축된 복음이다.
    우리가 복음이라고 말할 때, 크게는 성경 말씀 전체가 다 복음입니다. 그러나 성경말씀 전체를 줄이고 압축하고 요약하여 말한다면 그것은 칭의의 교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이 가르침 위에 존재합니다. 이 교리는 기독교 복음의 토대입니다. 칭의라는 말은 법정적인 용어로 사용이 됩니다. 재판장이 법정에서 무죄라고 선언하는 것을 여기 칭의라는 말로 쓰고 있습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하나님께서 무죄라고 선언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칭의의 반대말은 바로 ‘정죄’(condemnation)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로서 주어지는 무죄 선언은 어떻게 살았느냐, 선하게 살았느냐 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었느냐 로 결정이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죄 선언을 얻기를 원해서 열심을 내서 살다가 그 완벽하신 재판장 앞에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기의 열심과 선한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값없이 그 무죄선언을 얻게 되고 의롭다는 선언을 듣게 된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복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B. 우리 시대 교회의 문제: 무지(ignorance)와 냉담(apathy)
    그런데 우리 시대의 교회가 가지고 있는 태도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시대 사람들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무지와 냉담입니다. 영어로, ‘I don’t know and I don’t care’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모르면서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현대 교회의 문제를 이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그리고 교회 역사 속의 모든 참된 신자들이 보여준 태도는 그것과는 거리가 너무나도 먼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믿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무엇을 믿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전혀 없고 도무지 알려고 하지 않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보다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이런 질병이 있지는 않습니까? 고치고 돌이켜야 하는 문제입니다.

    2.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난제: ‘의롭다 함’(justified)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심판대에 설 때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입니다. 사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난제는 절대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에 ‘의롭다 함’을 받는 문제인 것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이생에서 잘 살았다고 해도 하나님께로부터 영원을 지옥에서 보내라는 최종적 선고를 받는다면 그것은 결코 잘 산 인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는 고통도, 환난도, 질고도 겪었고 입은 상처도 많지만, 하나님께 의롭다는 선고를 받고 영원히 하나님과 천국의 기쁨을 누리고 산다면 그는 잘 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신칭의의 교리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이 최종적인 하나님의 선고를 그 날에 가서야 받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날에 있을 선고를 알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을 구원의 확신이라고 부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세상에서 괜찮게 살았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즉,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느냐 입니다. 오늘 짧은 본문에 ‘의롭다 함을 받는다’(jusified)라는 단어가 무려 5번 나오는데, 16절에 세 번, 17절에 한 번, 21절에 한 번 나옵니다.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A. ‘하나님은 의롭고, 나는 의롭지 않다.’
    그런데 이것이 왜 문제가 됩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롭고, 나는 의롭지 않기’때문입니다. 성경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선언하기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합니다(롬 3:23).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합니다(롬 3:10). 저와 여러분은 모두가 의롭지 않은 죄인입니다. 죄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죄 선고를 받는 것,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것 외에 없습니다.

    B. 어떻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그러면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까? 여기에 길이 오직 하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이신칭의의 교리이며, 바울 사도가 오늘 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입니다. 그 논리를 잘 들어보십시오.

    3. 위대한 선언(15~16)
    오늘 본문의 처음 두 절인 15절과 16절은 하나의 선언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위대한 선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7절부터 20절은 이 가르침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고 또 거기에 대답을 주는 내용입니다. 먼저 위대한 선언을 봅니다.

    A. ‘혈통적 유대인과 이방 죄인 사이에 차이가 없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보통 유대인들이 자신들에 대하여 그리고 이방인들에 대하여 쓰던 표현을 그대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 두 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이방 죄인들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그들이 언약 밖의 외인들이고 하나님 앞에 소망이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우리 유대인이 선민의 모든 특권을 가졌다고 주장한다고 해도,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 용납된다는 점에서는 이방인보다 나을 것이 없다.”

    즉, 혈통적 유대인과 이방 죄인 사이에는 구원에 있어서 차이도, 차별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현대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도덕군자나 살인강도나 구원을 받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도덕군자가 살인강도보다 더 우위에 있거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마 일반적으로 우리를 포함하여 인간이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아닐까요? 우리의 태생, 우리의 행위, 우리의 공로 등이 구원에 있어서 아무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너무 무시를 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B.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
    바울 사도가 생명을 걸고 주장하며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가르침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인간의 우쭐대고 싶어하는 자존심을 부추겨주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산산조각냄으로써 하나님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바로 이신칭의의 가르침이 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16절에서 세번의 거듭된 진술을 함으로써 바울 사도는 이 교리를 설명합니다. 

    i. 일반적(general) 진술 (16a)
    처음에는 일반적 진술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바울과 베드로 모두가 동의할 뿐 아니라 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복음의 일반적인 내용입니다. 이것은 하나의 법칙이고, 원리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 일반적 진술에 동의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ii. 개인적(personal) 진술 (16b)
    그래서 이 법칙, 이 원리에 근거하여 바울 사도는 자신의 개인적 진술을 전개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함이라”는 대목입니다. 헬라어에서 믿는다는 단어는 목적어 앞에 전치사를 동반하는데 into에 해당하는 전치사를 사용합니다. 즉,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믿는다’는 뜻이 됩니다. 믿음은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위탁(commitment)이란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믿음은 관계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께, 그분 안으로 내가 들어가서 피난처로 삼는 것입니다. 그에게로 달려가 자비로우신 주님을 부르는 실제적 행위를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인생을 그리스도께 완전히 위탁했습니다. 이것이 믿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믿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나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을 받을 만한 의가 없음을 인정합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선함을 가지고 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절대 기준에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온전하게 지키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저의 죄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진노를 다 받으심으로 저를 위한 속죄를 이루셨음을 믿습니다. 이제 저의 삶을 저의 능력과 자존심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분 안에 들어가서 나의 피난처를 삼고 살다가 하나님 앞에 서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의로우심이십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고백하실 수 있으십니까? 아니면 여전히 여러분 자신의 힘, 자존심 가지고 안간힘을 쓰고 사십니까?

    iii. 보편적(universal) 진술 (16c)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함을 육체가 없느니라”라는 부분입니다. 이것은 보편적 진술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이 법칙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에도 칭의의 개념이 있었습니다마는, 그 칭의는 ‘이행칭의’(以行稱義)였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여기서 말하기를, 이행칭의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C.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칭의
    칭의에 대하여 종교개혁 당시 성도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과서로 만들어진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설명은 매우 분명합니다. 칭의의 교리를 잠시 정리하기 위해서 제가 이것을 읽어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정한 믿음으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습는다. 비록 나의 양심이 고소하기를 내가 하나님의 모든 명령을 심각하게 범하였고, 그 중 아무 것도 지키지 않았으며 모든 악을 향하여 기울어져있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의 아무런 공로도 없이, 단지 은혜로 나에게 완전한 만족과 의와 그리스도의 거룩을 허락해주시고 전가해 주십니다. 마치 내가 처음부터 아무 죄도 지은 적이 없는 것 처럼, 마치 내가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순종을 다 완전하게 이룬 것 처럼 해주시는 것인데, 이것도 내가 믿는 마음으로 그런 은총을 받아들일 때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4. 반론: 칭의 교리는 죄를 조장하는 교리다(17~18).
    이런 칭의의 교리는 바울 사도의 시대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반론에 부딪혀 왔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칭의 교리는 죄를 조장하는 교리다’라는 반론입니다. “마지막 심판날에 있을 선고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선하게 살아서 그날을 준비하라”고 해야 안전하다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칫 칭의의 교리가 마지막 심판날의 선고를 앞당겨서 무죄로 선언해주면 오히려 무책임하고 부도덕하고 방종한 삶으로 인도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의 불신앙의 증거입니다. 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사람, 즉 참된 구원을 얻은 사람의 삶은 결코 방종으로 이끌려 망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구원얻은 사람이 죄를 전혀 짓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17절과 18절에서 말하는 바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즉,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교리가 사람의 도덕적 책임감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결국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죄를 짓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는 반론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라는 그의 단호한 부정문으로 대응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설교가였던 로이드존스 목사님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은혜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참 설교는 늘 그것에 대해 제기되는 이런 비난(도덕률폐기론)의 가능성을 가져온다. 만일 구원의 복음에 대한 내 설교와 표현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바울 사도는 18절에서 자신이 헐었던 것 즉, 유대교가 가르치는 이행칭의의 교리,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을 다시 세우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넘어졌던 문제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고 나서, 마치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처럼 행동한 것입니다. 이것은 또한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혹을 받고 있던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했던 복음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는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는 교리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5. 바울의 4가지 주장(19~20)
    바울 사도는 19절과 20절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로부터 흘러나오는 네 가지 분명한 선언을 합니다. 

    A.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19)
    바울 사도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로 회복시켜주는 방법으로서의 율법은 파괴되었고 나는 그런 율법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죽었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죽은 자가 관계를 맺을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제 구원의 방법, 칭의의 수단으로서의 율법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칭의를 위해서 그가 오직 그리스도만을 믿고 그분께만 자신의 신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향하여 죽는다는 표현은 율법을 부정하는 것이고, 율법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며 율법이 우리를 노예로 부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기 위해서 율법을 향하여 죽어야만 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B.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20a).
    우리는 여기서 아마 바울 사도의 기록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애송되는 구절인 갈 2:20로 들어갑니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여기에 두번째 선언이 나오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것은 첫번째 선언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밖에 머무시는 한, 그리스도와 따로 거하는 한, 그리스도께서 죄인의 구원을 위해서 고난을 당하시고 행하신 모든 일은 무용하고, 무가치한 일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 사실 이 말씀의 원의미는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강도들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들은 정말 말 그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어떻게 해서 일어납니까? 이것은 바울 사도만의 고백이 아니라 예수를 믿고 의롭다 함을 받은 모든 성도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서 나도 십자가에 달려 죽음으로써 죄의 저주와 하나님의 진노를 다 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름으로 알려져 있지 않은 한 흑인 노예는 이렇게 찬송시를 썼습니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주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때로 그 일로 나는 떨려 떨려 떨려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

    C.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20b).
    바울 사도는 여기서 기독교의 완전주의나 신비주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지상의 삶에서 완전에 도달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또한 기독교 신비주의자의 경지를 고백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신자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가 된다는 것은 이신칭의 교리의 핵심적 진리입니다.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로 연합되게 하고 묶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안에 사시는 그리스도를 보시고 나를 판단하시는 것입니다.

    D.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다(20c).
    비록 칭의의 선물을 받았어도 우리는 여전히 육체 가운데 삽니다. 몸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삶도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을 뿐 아니라, 믿음으로 또한 계속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하는 믿음(saving faith)은 결코 한 순간의 결정이나 과거의 경험만으로 축소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했던 것이 이신칭의를 오해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결점이었습니다. 구원하는 믿음은 신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모두 영향을 미치는 살아있고 역동적인 실체입니다. 이 믿음은 구체적인 대상을 가지는 믿음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대상이십니다. 무엇이 구주를 십자가에 죽게 만들었습니까? ‘나를 사랑하사!’ 이것이 바로 아들을 죽게 한 동인입니다. 그 어떤 물리적 힘이나 강제력 또는 어떤 다른 목적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나를 사랑하사’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몸을 버리사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사랑이 구주를 죽게 하였습니다. 여러분, 오래 전에 애창되던 <사랑이 구주를 죽게했네 왜 날 사랑하나>의 가사를 기억하십니까?

    사랑이 구주를 죽게했네 왜 날 사랑하나
    겸손히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 사랑하나
    그 손과 발 날위해 찢기셨네 왜 날 사랑하나
    고난을 당하여 구원했네 왜 날 사랑하나
    내 대신 고통을 당하셨네 왜 날 사랑하나
    죄 용서 받을 수 없었는데 왜 날 사랑하나
    (후렴)왜 날 사랑하나 왜 날 사랑하나
    왜 주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구주를 죽게 한 것입니다. 

    6. 십자가를 욕되게 하지 말라(21)
    마지막으로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율법을 지킴으로서, 선한 사람이 됨으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구원이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부터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십자가를 헛되게 만드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욕되게 만드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너무나 신뢰해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선언하는 바와 같이 내가 그토록 죄인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모욕이라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의롭다는 최종적 무죄선고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즉, 만일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는 헛되이 죽으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의 죽음이 불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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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벧전1:8)